2019년 7월 24일 수요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A Brighter Summer Day, 에드워드 양, 1991)을 보고


 1

 고작 영화 한 편. 영화 한 편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영화가 아무리 현실을 재현하고자 노력해도, 이미 카메라로 시점을 정하고 편집을 하는 순간 현실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이다. 이런 한계를 직시한 어느 순간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단순한 유흥거리가 되어 있었다. 깊이를 가진 척만 하는 영화들. 가짜 경험을 재생산하고, 시대의 아픔을 스펙터클의 소재로만 사용하는 작가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이 영화는 4시간 동안 (영화의 긴 러닝타임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영화적 체험'을 전한다.


 2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전해져야하며, 현재에서 '살아 숨 쉬고 움직여야' 한다. <고령가>는 이러한 벤야민의 주장에 충실한 영화다.


 3

 1960년대 초의 대만은 너무도 불안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이후로 중국은 수난의 근대사를 겪었다. 8년 동안이나 일본군과 전쟁을 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전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결국 수백만의 사람들이 공산당을 피해 대만으로 도망 왔다. 대만이서는 국공내전으로 인해 피난 온 외성인, 수백 년 전부터 대륙에서 건너와 대만에 거주하던 본성인, 대만 섬의 원주민들이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것뿐인가, 권위적인 장제스는 스스로 총통 직에 올라 공산당의 토벌을 논하며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안정국을 조성했으며 군사독재를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의 역사 속에서, 청소년들은 부모 세대의 불안감을 그대로 답습했다. 당시 대만의 청소년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었을 뿐이다. 공부를 잘해서 엘리트 계층에 편입되거나, 폭력조직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거나. 대만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랑의 역사'였다. <고령가>는 이러한 60년대 대만의 사회적, 역사적 배경 속에 관객을 데려다 놓는다. 마치 영화는 관객들에게 '대만의 역사를 공부하고 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영화를 보지도 못할걸?' 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공산당에게 대륙을 내주고 대만으로 패퇴한 후 국민당군을 사열하는 장제스. 그는 말년까지 '대륙 회복'에 대한 희망 아닌 망상을 놓지 못했다.

 4

 14살의 내성적인 소년 샤오쓰는 낮은 국어 성적 때문에 중학교 주간부에서 야간부로 옮긴다. 소년은 야간부에 다니며 '소공원파'라고 불리는 소년 갱단원인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러던 중 소년은 우연히 소녀 밍을 만난다. 소년은 소녀에게 반한다. 하지만 소녀는 '소공원파'의 보스 허니의 여자였으며, 허니는 밍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 조직 '217파'의 보스를 죽이고 은둔해있는 상태였다. 보스의 부재로 통제력을 상실한 '소공원파'와 '217파'의 대립은 격해진다. 소년은 소녀를 지키기 위해 이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꼽는 이 영화 최고의 장면 중 하나. 짧은 장면이지만 사춘기 소년의 섬세한 감정을 뛰어난 감성으로 표현한 감독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5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장장 4시간에 달한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다. 상식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4시간 동안 샤오쓰의 이야기, 밍의 이야기, 샤오쓰의 가족들의 이야기, 폭력조직들 간의 암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만큼 등장인물들도 십 수 명이 넘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허비되는 장면이나, 대사나, 이야기나 등장인물들은 '하나도' 없다. <고령가>는 각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유기적으로 촘촘히 연결하며 4시간 동안 시종일관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비록 영화가 14살의 소년 샤오쓰를 주인공으로 두고 있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들과 거리를 두며 개개인의 삶과 사건의 흔적과 시대의 공기만을 영화에 담아낸다.


주인공 '샤오쓰'(장첸 분)와 그의 귀여운 친구들. <고령가>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 허비되는 캐틱터는 단 한 명도 없다. 

 6

 <고령가>는 '거리를 둔' 이야기이다. 주인공 샤오쓰는 '소공원파' 패거리와 어울리지만 '거리를 둔'다. 밍을 좋아하게 되지만 그가 전설적인 폭력배 허니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마찬가지로 '거리를 둔'다. 하지만 허니가 복귀하고 샤오쓰가 그를 친형처럼 따르게 된다. 허니는 상대 조직 '217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허니의 복수와 밍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적극적으로 끼어든다. 결국 샤오쓰는 퇴학을 당하고 외톨이가 되어버리는데 설상가상으로 밍이 '장군의 아들'인 친구 샤오마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버린 것이다. 폭력이 내재된 시대와 사회의 분위기와 개인의 쓰라린 사정들은 결국 샤오쓰에게 내재된 폭력성을 폭발시킨다. 영화 는 내내 '거리를 두'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객은 이야기와 거리를 둘 수 없게 된다.



샤오쓰는 정말로 밍을 '사랑'한걸까. 어쩌면 샤오쓰에게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위안받기 위해 우상화할 대상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7

 제목에도 '살인사건'이 들어가지만 영화에서 살인사건은 정작 맥거핀에 가깝다. 이 영화가 뛰어난 이유이다. 시대가 가진 폭력이나 아픔을 말초적인 자극을 가하는 스펙터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내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는 '관조하는' 영화이다. <고령가>는 언뜻 보면 시퀀스마다 그리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서사를 유려하게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이라기보다는 사건이나 순간을 기록한 풍속화나 풍경화에 가깝다. 샤오쓰 가족 개개인의 사연, 아버지와의 각별한 관계, 폭력 조직원들 개개인의 사연과 드라마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펼쳐지기 때문에 주인공 개인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고 하는 시도는 소용없다. 각 장면장면을 분절된 몽타주로 봐도 좋을 정도인데, 이 개별적인 사건과 장면들은 영화의 종지부에서 직소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듯이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4시간의 대장정의 끝에서, 우리는 슬픔, 안타까움, 애처로움 등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고령가>는 '비극'이다. 시대의 불안이 잠식한 소년의 삶을 다룬 비극.


샤오쓰와 아버지 간의 애틋한 관계. 그러나 결국 가족은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침몰해버린다.

 8

 위에서 얘기했듯이 영화는 절대로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도 영화를 담아낼 수는 없다. 세계의 유수한 평론가들이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남겼다. 허나 그들 모두가 글로는 이 영화를 다룰 수 없다고 했다. 예전에 정성일이 이 영화를 보고 7시간 동안 강연을 진행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로도 부족했다. <고령가>를 글로 다루려면 수백만 장이 넘는 글이 등장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본인이 타임머신을 타고 1960년대의 대만으로 날아갈 노릇 밖에는 없다. 우리는 영화에 한없이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영화를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는 없다. 이 영화가 아무리 오래된 사건을 다루고 있고 이미 해묵은 영화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영화가 역사, 기억, 시대, 감정, 현재를 묘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고령가>에서는 '전등'이 유난히 부각된다. 전등을 켬으로써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발버둥쳤던 소년은 결국 스스로 전등을 깨버리고 어둠 속에 잠식되기를 선택했다.

 9

 글이 꽤 길어졌다. 내내 써놨듯이, 백문이 불여일견. 수많은 유수의 평론가들의 글들을 읽어봤자 이 영화에 닿을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이 영화를 담아낼 수는 없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써놨는데도 아직 할 말이 태산이다. 나는 여기서 글을 줄이겠다. 내가 유수의 평론가도 아니고, 이 글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 편의 영화가 본받아야 할 모든 자세와 방식을 선사하는 영화이다. 4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과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나 대만의 복잡한 근현대사가 <고령가>를 어려운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드는가? 그런 어려움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인생의 하루를 기꺼이 바쳐도 되는 영화이다. 물론 대만인만이 완벽하게 공감하겠지만, 시대와 역사가 가진 폭력과 아픔을 아는 한국인들은, 다른 외국인들보다도 이 영화를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만의 현대사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아픈 역사와 기억을 대하는 태도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그 태도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영화는 과연 '진짜'를 보여줄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진짜에 가까워질 수는 있다. 에드워드 양은 현실에 한없이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 낸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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