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5일 목요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보면 참 쉽기도 하고 골똘히 깊게 접근해 보면 이만큼 어려운 질문이 또 없다. 모두가 한 번쯤은 생각을 해보았겠지만, 동시에 막상 길게 서술해보라 하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 것이다.

 내가 이 질문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가 기억이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소위 말하는 ‘중2병’이라는 것을 한참 겪고 있었을 때였는데, 도덕 선생님께서 도덕 수업 내용으로도 가르치셨고, 시험 문제로도 나와서 그 때 한참 고민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굉장히 질문에 몰두하여 중2 내내 살았던 기억이 있고, 결국에는 시험에서 글을 아주 잘 써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중학교 2학년 때보다는 더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으로 이 질문에 답해야겠다는 모종의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 (지난 4년 간 그만큼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에도 그렇다.) 따라서 최근에 읽어 본 내가 좋아하는 ‘마르크스’, 그리고 ‘라캉’이라는 철학자와 ‘구조주의’라는 개념, 그리고 각종 이상한 철학들을 들먹이며 서술해보고자 한다. (공부가 굉장히 아마추어적이었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이해와 인용 그리고 궤변이 난무함을 이 글을 읽을 여러분에게 미리 알려드리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는 개인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답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겉으로’, 하나는 ‘속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겉으로’ 대답하자면, ‘나’ 라는 존재는 ‘김림’이라는 이름, ‘19살’이라는 나이, ‘남자’라는 성별. ‘XX고등학교 학생’ 이라는 신분 등으로 뻔하게 대답할 수가 있다. ‘속으로’ 대답하자면, ‘주체’, 또는 ‘객체’, ‘자아’‘타자’등 온갖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들며 세계와의 관계 등과 함께 ‘나’라는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라캉이라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는 S/s라는 기호를 내세우며 ‘기표’‘기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기표’는 우리가 직접 삶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즉 인간이 감각으로서 체험하는 모든 것,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얘기한다. 위에서 얘기한 ‘겉으로’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기의’는 ‘그 속에 있는 무언가’를 얘기한다. 위에서 얘기한 ‘속으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비슷한 개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인이 텍스트를 잘못 이해해서 올바르지 못한 인용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라캉은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나도 그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사유는 절대적으로 감각과 경험에 의존하고, 감각은 절대로 깊은 곳 그 이상, 인간의 경험 그 이상에 닿아 현학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찾기에는 매우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라캉은 아기가 생후 몇 달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모든 것을 무작위적인 덩어리, 즉 이미지로만 받아들이는 ‘상상계’를 거쳐, 거울을 보고 (거울은 문자 그대로의 거울일 수도 있고, 또는 엄마 등 타자의 얼굴이기도 한다) 처음으로 엄마와 ‘나’는 따로 떨어져 있으며 타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동시에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상징계’로 진입하게 된다. 바로 ‘언어’라는 것을 습득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아기가 ‘언어’와 ‘텍스트’를 접하며 상징계에 진입하게 된 순간, 아기는 어머니와 완전히 분리되게 되고, 비로소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규정되고, 인간은 자기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에, 즉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들에 들어선다. 바로 이러한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한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한 사회의 실제적 토대를 이룬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인간관을 전개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결국 인간은 관계로서 규정되며 관계들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토대를 이룬다고 설명한 것이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며 ‘나’를 주체로 오인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과 달리 그리 특출나고 소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 ‘주체’라는 것은 타자에 의해 형성되고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라캉이 설명했듯, 자아와 주체의 인식은 오인에서 시작되는데, 그 상황에서 언어와 텍스트를 접하며, 이름이 붙여지고, ‘호명’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를 접하며 상징계에 접어든 순간부터 기표만을 인식하며, 기의에 닿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림’이라는 이름은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다. 작명소에서 지어져 우리 부모님께서 그냥 적당히 붙여준 것, 즉 타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김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지만, ‘나’가 김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장소에 ‘김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잔뜩 모아놓고 다른 한 사람이 ‘김림’이라는 이름을 부르면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호명하는 줄 알 것이다. 그 상황에서만큼은 ‘나’는 ‘김림’이라는 특별한 주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 외에 ‘19세’, ‘양업고등학교 학생’, ‘남자’라는 다른 기표들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19세’, ‘양업고등학교 학생’, ‘남자’라는 기표로 나타낼 수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표만으로 우리 스스로와 세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경험하고 경험을 통해서 인식하고 사유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관계와 관계들로 맺어지고 얽혀진 구조 속의 산물이다. 부모님과 부모님과의 관계, 나와 학교와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 나와 친구와의 관계 사이에서만 나는 존재하고 호명된다. 인간은 절대로 구조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지구상에는 70억 이상의 인간이 존재하고, 인간이 부모도 모르는 채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아예 사람들과의 접촉이 전무한 채로 평생을 살아간다면 몰라도, 관계와 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그 구조 속에서만 존재하고 인식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표들에 대한 ‘명명’은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진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내가 불릴 호칭 등 또한 항상,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타자의 호명을 받아 나는 주체가 된다. (주체로 오인하게 된다.) 결국 타자에 의해 개개인이 주체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주체화’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성경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호명됨으로써 신의 질서에 복속된 것과 굉장히 유사한 원리이다. (굳이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신’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연’, ‘우주’, ‘사회’ 등의 개념을 대입해도 괜찮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구조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결국 ‘사랑은 의무적인가?’와 같은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도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어떤 대상을 다른 것보다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나 상태’ 등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런 식으로 접근해본다면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이 사랑이 되게 된다. 인간은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접하는데,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냥 타자 A, B, C......이렇게 칭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관계를 맺게 됨은 그 사람을 다른 타자들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나 상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사랑은 의무적인 것이 된다. 인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구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관계의 바탕은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를 낳고, 관계는 구조를 낳고, 구조는 또 다시 인간을 낳는, 이런 순환의 원리가 인간 세계 속에서 지속되는 것이다.

 내가 너무 과도하게 극도로 회의적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면도 있을 수도 있다. 보통의 친구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가 누구지? ‘주체’와 ‘자아’는 뭐지? 등의 질문과 질문을 이으며 골똘하게 생각하는 마당에, 본인은 ‘주체’와 ‘자아’ 같은 것은 없고, 인간은 결국 관계와 구조 속에서, 타자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설사 ‘주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기표일 뿐, 진짜 나 자신을 찾을 수는 없다~ 와 같이 회의적이고 괴상한 사유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책 내용의 일부분과 사진을 접하면서 부터이다.


 이 사진은 우주탐사선 보이저 2호가 지구에서 무려 60여 억 km나 떨어진 지점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고 본인은 깨달았다. ‘아, 인간은 저 거대하고 방대한 우주에서 먼지 한 톨보다도 못한 존재구나! 열심히 살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구나!’
 그 때부터 회의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책의 전체 요지를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아주 심각한 오류였다.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저 사진을 예로 들며 ‘지구가 우주에서 유일한 삶의 터전이고, 인간만이 사유를 하고 문명을 꾸린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주의 작동 목적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을 보존하기 위해 열심히 살자!...’의 요지를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완전히 잘못 짚어버린 것이었다.

 사실 위에서도 굉장히 회의적이고 비약적인 서술을 하며 부정적인 사유를 전개한 본인이지만, 본인 스스로 이러한 사유를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해 굉장히 반성하고 있다. 저렇게 극단적인 사유를 이어나가면,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냥 단백질과 탄수화물 등으로 이루어진 물질에 불과하고, 인간은 아무 쓸모도 없다. 와같은 극단적인 유물론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내 글의 요지도 ‘인간은 결국 관계와 구조 속에서, 타자에 의해서만 주체화 되니까 나는 되게 쓸모없는 존재구나. 그냥 죽어버리자, 막 살자.’ 따위의 부정적인 요지가 아니라 ‘인간은 결국 관계와 구조 속에서, 타자에 의해서만 호명되며 명명되고 주체화 된다는 것을 과감하게 인정하고, 그 속에서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기의, 즉 진정한 주체와 자아를 어떻게든 찾기 위해서 관계와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사유하고 탐구하며 투쟁하자’는 요지였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본문의 내용에는 이러한 요지가 전혀 들어있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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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게 2019년 2월 쯤이던가, 학교 철학 방과후 수업 과제로 썼던 글이다. 물론 질문에서 물어보는 것에는 답을 안 하고 이상한 말만 주저리주저리 써놔서 수업 담당 신부님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 놓기는 했다. 저때 나름 좀 어려운 텍스트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허위 의식에 절어 있었다. 문장은 단조롭고 딱 자기 할 말만 해야 한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다른 거 다 필요없이 항상 자기 할 말만 간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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