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4일 수요일

학습된 증오에 잠식당하는 사랑, 불행한 연인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li: Fear Eats The Soul,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를 보고

 주인공 ‘에미’는 장성한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청소부 일을 하며 외롭게 근근이 살아가는 60대 여성이다. 에미는 남편과 사별하고, 자녀들을 모두 건실히 키워낸 굳건한 여성이지만, 나이들어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완전히 사라진 채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소외자이다. 어느 날 그녀는 술집에 들렀다가 ‘알리’를 만난다. ‘알리’는 모로코에서 건너온 카센터에서 일하는 젊은 외국인 노동자이다. 그 역시도 “독일인은 주인, 아랍인은 개” 라는 독일 사회의 암묵적인 차별과 냉소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소외자이다. 둘은 춤을 추며 깊은 대화를 나누다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나이와 인종을 뛰어넘어 마법같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사랑을 이어나가 결혼에 이르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아파트 이웃들은 에미가 외국인이랑 놀아난다며, 에미가 ‘쿠로프스키’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으니 순수 게르만인이 아닐 것이라며 수근대고(사실 에미는 남편이 폴란드계였기에 폴란드계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인데도), 직장 사람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에미를 따돌리며, 자녀들은 자신의 결혼을 알리는 에미에게 크게 분개하며 어머니를 “창녀, 돼지, 걸레” 등으로 비하하고 에미의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까지 한다.
 에미는 알리와 사랑하며 전에 느껴본 적 없던 행복함을 느끼지만, 오히려 사회의 차가운 시선으로 인해 극도의 불안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알리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백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알리는 아랍인 친구들과 멀어지며, 술집에서 어울리던 다른 친구들에게도 노골적인 적대감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주위의 혐오 섞인 차가운 시선은 두 사람이 도피성 여행을 다녀온 뒤로 따듯한 시선으로 뒤바뀐다. 하지만 이는 모두 각자의 이익만을 위한 위선일 뿐이고, 인간적인 이해가 아니었다. 에미의 자식들은 아이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며 대뜸 어머니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집 앞 슈퍼마켓 주인은 고객을 잃어 매출이 줄었기에 에미에게 다시 친절하게 대하며, 직장 동료들은 유고슬라비아인 노동자가 새로 들어왔다며 에미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주며 따돌림에 동조하게 만든다.
 이렇게 불행이 다시 행복으로 바뀐 듯 한 순간 정작 둘의 관계에 마찰이 찾아온다. 주위 사람들에게 동화되어버린 에미는 알리를 은연중에 열등한 인간으로 대하기 시작하고, 알리는 자신이 결국 사람들의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타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옛 애인에게 돌아가 외도를 저지른다. 에미는 알리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알리 역시도 거울을 바라보다 추해진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둘은 화해하게 된다. 에미와 알리는 바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들으며 춤추고, 자신들에게 다시 다가올 행복에 젖을 생각에 취하지만, 알리는 이미 외국인 노동자들이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주 걸리는 불치병인 위궤양에 걸렸고, 병상에 누워있는 알리를 에미가 쓸쓸히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1974년 뉴저먼시네마 사조의 기수라 불리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파스빈더 감독은 1950년대 전형적인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줄거리, 편집, 조명, 촬영기법이라는 틀을 차용해 거기에 브레히트가 제시한 소외효과를 더해 ‘사회비판적 멜로드라마’ 라는 독특한 장르를 제시하며 2차대전 이후 독일 사회에 내재된 파시즘과 사람들의 위선을 공격하고 있다. 주인공 에미가 2차대전기 나치당원이었다며, 그 때는 모두가 당원이었다고 알리에게 고백하는 부분이나, 에미의 사위가 터키인 에게 꾸중을 듣는다는 이유로 외국인 노동자를 공공연하게 혐오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부분은, 독일을 휩쓸었던 파시즘의 광풍은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독일인들의 이데올로기에 여전히 내재되어있었음을 보여준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라는 제목이 굉장히 심오하면서도 독특한데, 이는 아랍의 속담이다. 원제목 'Angst Essen Seele Auf'는 알리가 자신의 서툰 독일어로 자기 나라의 속담을 통해 에미를 위로해주기 위해 한 말인데, 독일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독일어는 동사 변화가 굉장히 복잡한 언어이다. 그리고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내포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았을 때, 이렇게 어법적으로 틀린 제목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외국인이 복잡한 어법을 가진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어렵듯이 알리 역시도 독일 사회의 문화와 법칙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음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2차대전 후 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대중문화 (특히 영화) 가 공유하는 공통된 코드를 가지고 있다. 에미가 자녀들과 함께하는 장면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추축국 국가들의 전후 대중문화 속에서 비슷하게 내포되는 상실감과 우울함이라는 공통된 코드이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모두 전쟁을 일으켰던 전범 국가라는 이유로 국제 사회에서 묘한 따돌림을 겪게 되었고,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불러 일으켰던 광풍은 사람들의 의식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의 인명 살상과 경제의 불황은 사람들을 모두 피폐하고 궁핍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은 전후 복구 신화를 세우며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이탈리아는 강대국의 반열에 다시 오르지 못했지만 전후 복구를 착실히 해나갔던 나라이다. 그러나 이런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 속에 깊은 모순을 생겨나게 했으며, 자연스럽게 세 나라 모두 혼란스러운 현대사를 겪게 된다는 역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세 국가를 휩쌌던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광풍은 전후에도 사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었다.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단점인 막연한 감상주의에 빠지기 않기 위해 중간중간 느닷없이 긴 침묵을 첨가하는 연출, 인물들을 극한으로 몰고 가는 극적인 상황 전개, 영화에 줄곧 내포되는 ‘불안감’과 ‘억압’을 시각화하는 대비되는 색상과 의도적으로 좁고 답답한 장면의 연출은 이 영화가 단 15일 만에 제작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믿기 힘들게만 한다.

두 인물의 의상의 대비되는 색상과 안 그래도 좁은 아파트를 더 좁게 연출하여 억압을 시각화하는 카메라 앵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뛰어난 영화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치밀한 미학적, 영화적 완성도, 그리고 70년대 뉴저먼시네마라는 하나의 사조를 이끌어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있지만,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독일의 신화, 그 뒤에 숨어있던 독일 사회의 위선과 소외된 계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영화가 만들어진지 4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진행형, 또는 심화중인 독일의 외국인 노동자(또는 난민) 문제를 선구적으로, 그것도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영화가 내내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문제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 같은 것을 내려주지 않았던 부분은 약간 아쉽지만, 파스빈더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저 냉랭하고, 사랑의 완성도 구원도 희망도 그저 헛된 꿈에 불과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을 영화 속에서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도 복기할 만한 고민을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점은,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이유일 것이다.


현실은 우리가 감지하는 이상으로 잔인하다. 이들은 끝끝내 진실된 사랑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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